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려하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한다. 이 명제는 그 역도 참이라 할 수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철저히 잊으려하고 심지어는 무의식마저도 끊임 없이 기억을 왜곡시키려 한다. "거미숲"이라는 송일곤 감독의 영화도 이 같은 테마를 영화로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메멘토"가 떠올랐다. 그리고 쉽게 영화의 다음 스토리가 떠올려지는 식상한 소재의 영화가 아닌, 끊임 없이 감독의 의도와 스토리의 전개에 머리를 굴려야 하는 다소 인터랙티브한 영화였다는 사실에 보는 내내 즐거웠다. 스릴러라는 영화의 성격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영화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스토리 전개과정에서 몰입감이 부족했고 영상이나 음향도 아쉬웠다. 연기자들의 캐릭터 표현력도 TV드라마물 이상의 것은 못되었다. 난 그렇게 느꼈다.(뭐 니가 만들어봐라 이러면 할말 없지만)
그래도 "거미숲" 영화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자면 재미있는 게 참 많을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 발생하는 각종 의문들에 대한 답변 작성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까? 같이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리고 영화를 본후 저녁식사라도 예약된 상황이었다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내내 영화 이야기를 떠들어댔을 것 같은 그런 영화였다. 몇 가지 영화 관련 리뷰(?)를 작성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나는 영화를 보려 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글을 작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에 스포일러가 잔뜩 묻어나도 책임 못진다. 내가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같이 영화보고 나서 수다 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으니 영화이야기를 재잘재잘 해보자는 취지이지,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준도 못되고 또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비평가적 지위나 학식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영화이야기 들어가보자.

한 남자(강민, 감우성)가 숲을 해메다 별장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간다. 쇼파가 놓여있고 탁자 너머에 한 남자가 핏덩어리가 된채 죽어 있다. 건물 안은 온통 피범벅이다. 방안에는 다 죽어가는 여자가 겁에 질려 침대에 신음하며 쓰러져 있다. 남자는 쓰러져 있는 여자가 자기 애인(황수영, 강경헌)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잠시 후 다락 문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어느새 손에 든 낫으로 다락을 향해 조심스레 접근하는 남자. 다락 문을 열자 방안을 엿보고 있던 남자가 숲으로 도망친다. 낫을 들고 목격자를 뒤쫓는 강민. 숲속에서 도망치는 남자를 놓친 강민은 별안간 머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는다. 정신을 수습하고 나서 길가로 나와 비몽사몽 길을 걷다가 어느 터널을 지나던 중 뺑소니 차에 치어 교통사고를 당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다. 나머지는 강민의 기억이 만들어낸 진실과 왜곡, 착각의 뒤범벅이고, 이를 제3자인 친구 최형사가 수사를 하며 진실과 강민의 기억의 차이를 환기시킨다. 그럼 영화에서 제기될 법한 의문들에 대해 썰을 풀어보자. 사건의 현장에서 강민을 지켜보는 남자, 그리고 숲을 도망쳐 나가다 강민을 공격하는 남자, 나중에 강민이 최형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전화를 통해 필름과 정보를 제공하는 남자는 누구인가? 영화에서 끝까지 그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 아리송하게 처리하는 이유는(그나마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그런 인물 자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공의 인물은 강민의 또 다른 자아이고, 자신이 거부하고 싶고 믿기 싫은 자아이다. 그 자아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망각해 버린 기억을 갖고 있는 자아이다. 그리고 그 자아가 이제 진실을 밝히고 잊어버린(또는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전개양상인 것이다.

두번째, 그럼 여자는 뭐냐? 처음 등장하는 여자(은아, 서정)는 분명히 강민의 아내이다. 항공기사고로 신혼초에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강민은 같은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황수영(강경헌)을 만나게 되고 후에 방송국에서 다시 만난 인연으로 실제 연인이 된다. 황수영은 방송 리포터라는 안정된 신분이 아니기에 방송국의 교양국장과 내연의 관계를 통해 방송에 출연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터진 날, 그 장소가 강민의 과거 기억의 장소와 교차되면서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지닌 강민의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나 불륜의 현장을 급습, 두 남녀를 처참하게 죽이는 상황으로 나아간 것이다. 물론 이 살인을 저지른 자아는 강민이 거부하던 자아였기에 강민은 뺑소니 사고 이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깨어나도 자신이 저지른 살인행위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세번째,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무엇인가? 민수인이라는 초등학교 시절 여자친구가 사진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부분은 관객을 가장 난해한 상황에 빠뜨리기 위한 장치이다. 민수인이라는 여인(서정 역)은 바로 죽은 아내와 동일인물이다.(1인 2역) 강민이 죽은 아내와 동일한 외모를 가진 여성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죽은 아내가 과거 초등학교 여자친구로 분해서 강민의 기억을 추스리는데 돕는 역할을 설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좀 감독의 억지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는 그 관계에 대한 설명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아니면 내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일 수도 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를 따라 거미숲이 있는 초등학교에 전학온 10살의 강민. 그 아이는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숲의 별장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불륜이 발생하는 장면과 불륜의 두 남녀(불륜녀는 강민의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살인자는 아버지?)을 목격한다. 이후 거미숲의 별장을 떠나 읍내의 사진관에서 자란 강민은 성장해서도 그 사진관이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진관이라는 사실조차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것도 불과 1년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강민이 놀랍다. 강민은 철저히 과거의 기억에서 분리되어 지냈을 뿐더러 아버지와도 소식을 끊은 채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네번째, 강민의 취재와 기억을 돕는 민수인이라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강민은 자신이 어린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어린 민수인은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자신이 스스로 설명해주는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민수인은 죽은 아내였고, 강민은 죽은 아내를 통해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고 싶어했고 위안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수인(=죽은 아내)의 모든 행동과 대사는 강민의 의식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아마 어린 민수인은 어린 시절 거미숲에 대해서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친구와 관련된 소재가 진실의 전부였을 것이다.(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함께 목격했던 건지도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막바지에 강민이 동굴의 끝, 문을 열자 터널이 등장한다. 영화속 터널이란 설정은 거미숲과 현실의 통로이자 경계이다. 거미숲을 빠져나와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터널을 지나야 하고, 강민은 그 터널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도는 터널이란 설정은 강민의 기억과 현실의 경계선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동굴 문을 열고 나타난 터널에서 이제 과거의 완전한 기억을 되찾은 강민은 뺑소니차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한 이전의 강민을 만난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은 병원에서 다시 깨어난 강민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참.. 뫼비우스적인 구조는 좋은데, 되돌아간 지점이 아리송하다. 왜 병원인가. 그럼 최형사가 경찰들 동원해서 살인현장 수사하고 또 그뒤로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거미숲을 돌아다니며 이전의 기억을 되찾는 강민의 행동은 다 뭐란 말인가?)
결국 영화에서 실재 일어났던 진실은 거미숲의 살인사건, 교통사고 발생한지 14일 후 의식을 되찾은 강민의 왜곡된 기억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거미숲을 다시 방문하여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회복하고 진실을 발견한 강민이라는 것이 영화의 전부이다. 진실을 발견한 강민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은 아내에 의해 생이 연장되었고 기억이 회복되었으니 그 진실의 대가를 치르러 경찰서에 갔을까? 아...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 기억과 거미는 무슨 관계인가? 민수인이 전해주는 거미숲의 전설에 의하면 아무도 기억해 주는 않는 영혼은 죽어서 거미가 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100% 영화 속 설정인지 아니면 거미와 관련된 영화나 소설의 모티브를 활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보다 명확한 스토리와 영화 속 암시에 대한 정보는 감독의 설명을 들어야 파악이 가능할 것 같다. 다 알고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어서 일부로 정보를 찾아 보지 않았다.

그 외에도 영화가 제공하는 여러 의문점은 참으로 많다. 영화를 다시 보며 곱씹게 만드는 꺼리를 제공하려는 감독의 의도인가? 영화 보신 분들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 이해가 안가는 것들 몇가지는... ① 시작 부분 병원에서 깨어날 때는 분명 병실 맞은편에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엔딩 장면에서 깨어날 때는 아이로 바뀌어 있다. 무슨 뜻일까? ② 아내가 죽기 전 강민이 꿈이야기를 하는데 식탁에 사과가 담아져 있다. 웬지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라 여겼는데, 거미숲의 별장에서 최국장이 황수영과 정사를 벌이면서 사과를 먹으면서 전쟁을 외치는 대목이 나오면서 이건 또 뭐하자는 플레인지 모르겠다. 사과를 가지고 무얼 이야기하려는 걸까? ③ 민수인은 강민의 목도리를 자꾸 매만져 준다. 어린 민수인도 그랬고 죽은 부인으로 등장하는 성인 민수인도 그런다. 목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강민의 기억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동질감? 과거 기억의 공유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여자의 위안을 상징할까? 이 밖에도 영화를 보며 쏟아지는 의문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적어가며 보지 않아서 다 쓰진 못하겠지만 한번 더 보면 의문이 많이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의문점 때문에 영화 다시보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거미숲이란 영화는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는 썩 괜찮은 스릴러 물임은 틀림없다. 뭐 이런 맛에 스릴러 영화를 즐기는 거겠지만.
추리해 볼 꺼리들 몇가지 더...
(1) 강민과 민수인의 스웨터 목도리 색깔
(2) 강민이 황수영의 인형을 하늘로 올리는 점과 어린 민수인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
(3) 사진을 찍을 때 고개의 각도를 조절하라는 아내와 민수인
(4) 아내와 차마시는 시간 4시와 사고 발생한 시간 4시(손목시계 컷)
(5) 친구인 최형사의 설정에 대한 이해
(6) 부인이 마시라고 권하는 홍차와 민수인이 주는 허브차
(7) 민수인이 아픈 강민에게 먹여 낫게 한 거미줄로 만든 환약
(8) 어린 시절 살인현장을 목격하고 나타난 거미와 현실의 살인 현장에서 나타난 거미
(9) 거미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것은 무슨 의미?
(10) 강민의 머리에 물음표 모양으로 난 수술자국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