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27

오! 수정

홍상수 감독의 본격 리얼리티 남녀심리묘사물의 그 첫번째 시리즈인 "오! 수정"을 개봉한지 6년이 지난 시기에 늦어도 한참 뒤쳐진 상황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홍상수 감독 하면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로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었으나, 후속작 "강원도의 힘"에는 관심이 가지 않은 채로 잊혀진 이름이 되었었다. 그러다 지난 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작품을 통해 홍상수 감독의 리얼리티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평소 남녀의 본질과 심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배경도 있었고 솔직한 성격에 솔직한 서사를 보여주는 영화에 눈길이 가는 편이라 이제 저 6년 전 제작된 "오! 수정"을 큰맘 먹고 관람하기에 이른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본격 리얼리티 남녀심리묘사물의 첫 시리즈 "오! 수정"은 흑백모노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 서사의 적나라함이 외설논쟁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심금을 털어내지 못했다. 거기다 영화의 히로인 이은주씨가 이제는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보니 영화의 흑백 톤은 마치 이은주 추모영화를 보는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은 남녀의 심리에서 껍질을 벗겨내고 그 속알맹이를 한번 빤히 들여다보자는 취지에서 제작된 것 같다.

영화의 첫번째 파트는 남자의 시선(정보석)에서 유치하고 속물스런 근성이 숫자로 매겨지는 작은 부분들로 나뉘어 드문 드문 나열되어졌고, 두번째 파트는 여자의 시선(이은주)에서 남자가 우연으로 알고 있었던 부분들이 정교한 여자의 연출에 의해 기획된 결과라는 뜨끔한 사실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남녀가 함께 했던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두 남녀의 기억에서는 차이를 보인다는 데 있다. 뭐 남녀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게 대부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는 우스개 소리가 널리 회자되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여자의 시선에서 비춰진 의도된 상황이라는 점은 속물적인 계산의 결과라기 보다 본능에서 내린 결단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어차피 영화 속에 드러난 의도된 상황은 삼각관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케이블 TV의 PD로 일하는 영수(문성근)는 독립영화 제작을 위해 돈 많은 후배 재훈(정보석)의 후원이 필요했고, 그런 재훈은 영수와 함께 일하는 구성작가 수정(이은주)에게 마음이 있어, 영수는 자신을 좋아하는 수정을 재훈에게 연결시켜 자신의 뜻한 바를 이루려 한다. 역시 재훈도 수정과의 만남을 위해 평소 잦은 왕래도 없었던 영수에게 후원의 뜻을 비추고 결국 수정과 사귀게 되는데, 정작 수정은 이들의 거래(?)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의해 재훈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처녀성을 담보로 재훈과 깊은 만남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그 속내에는 계산에 의한 연출을 통해 의도된 상황을 끊임없이 설정하고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 각자의 뜻을 이뤄 낸다는 이야기다. 영수는 자신의 꿈인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수정은 가난하고 미래가 암담한 영수 대신 돈 많고 미래가 든든한 재훈을 만나게 되고, 재훈은 그렇게 저속하지 않고 여지껏 처녀성을 간직한 채 살아온 그녀를 만나게 되었으니 성공 스토리인 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는 의도된 코미디물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재훈이나 영수가 보여주는 이중적인 모습들이 수정의 시각을 통해 처절하게 그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에 그러했고, 수정의 의도된 상황에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재훈의 행동이 폭소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정말 따지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남자들은 그렇게도 여자가 자신에게 처음이기를 바라는가? 영화 속 재훈은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 부분에서 만큼은 유치의 극치를 보인다. 처음 사귀자고 데쉬할 때의 유치함이 그 첫째요, 영수에게 실망하고 재훈에게 눈을 돌린 수정에게 섹스만을 고집하며 덤벼드는 모습이 그 둘째요, 호텔에서 수정과 첫(?) 정사를 나누고 난 후 침대에 흥건한 피를 보며 자신이 처음이라고 순진하게 믿고마는 그 멍청함이 셋째다. 아니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왜 중요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순간 사랑의 절정에서 행복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도대체 그 처녀막(순결)이란 것이 무엇이관대 그것에 집착해서 진정한 짝을 찾았다고 흥분하는가? 나는 수정이 침대에서 재훈에게 "저 처음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재훈의 그 얼빵한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너무나 큰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어서 짐짓 속으로 "아니 이 영화는 코미디 물이 아니던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든 대목이었다.

순결... 어쩌면 중요한 가치일지 모른다. 물론 사람마다 제 각기 인생관, 사랑관, 윤리관이 다를 테니 이 부분에 대한 생각도 천차만별이리라. 웃긴 것은 남자에게 순결이란 것은 별 중요한 가치가 못되는 것은 분명한데, 유독 여자에게 순결의 가치는 아주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는 분명 오랜 가부장적 남근중심사회의 유산에서 비롯된 관념임에 틀림 없다. 영화에서 재훈은 수정이 '처녀'라는 사실에 반가워하면서 결국 그녀의 첫 경험의 상대가 됨으로써 진정한 짝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도달하는 재훈의 속내를 보여준다. 이는 분명 자승자박이며 이런 남근중심적 사상이 팽배한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정의 의도된 연출은 매우 스마트하고 정당한 (그리고 통쾌하기까지 한) 행동으로 평가받을 만 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재훈이 호텔방을 잡고 수정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마지막에 호텔에서 첫 섹스에 성공한 재훈이 수정의 처녀성을 확인하고 뿌듯한 마음에 '제짝을 만나 만사형통'이라 생각하는 내용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보며, 이 영화의 영어 제목(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은 역설의 뜻을 지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 뜻은 "총각, 그 처자에 의해 낫낫히 발가벗겨지다"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돌이켜 생각할수록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였음이 확실해진다. 더불어 홍상수 감독의 리얼리티 남녀심리묘사극의 두번째 시리즈가 궁금해진다. 세번째 시리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먼저 보았기 때문일까? 남녀가 함께 보면 안될 영화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정작 내가 아는 여성들에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꼭 권하고 싶다. 남자들이란 게 다 이런거다 하고 그 본질을 널리 홍보하고 싶어진다. 남자의 심리와 본질이 궁금한 처자들이여.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권한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꼭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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